이한범

앎 없는 밤의 읽기

2024년 6월 28일


지난해 나선프레스에서 발행한 『모닝빵』(김지환, 민성식 그림, 이상우 글)의 인쇄를 넘기고 보도자료를 준비하며 ‘임시’로 써둔 소개문은 다음과 같다.

“도시의 골목들, 울타리 쳐진 들판, 절벽, 구석진 담벼락,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동굴과 구멍과 문을 건너며 번쩍이는 미러볼, 뭉개진 로드콘, 모닥불에 모여든 생쥐들, 우비 쓴 사람들, 불 꺼진 전구, 깡총깡총 뛰어가는 연필, 노래 부르는 주사위, 뜯어진 철망, 풀 죽은 강아지와 긴장한 고양이, 목 묶인 눈사람, 웃는 해골과 풍선 같은 선인장, 날아다니는 돈다발, 흔들리는 꽃들과 마주치고 끊이지 않는 폭발음과 소음과 음악과 웅성거림을 듣는 모험의 그림 동화.”

책이 제작되어 나오면 실물을 살핀 이후에 이 “임시로 써둔” 글을 완성할 생각이었는데, 당시 나는 보도자료를 두고 좀 고심하는 상황이었다. 보도자료는 글과 그림이 책으로 사물화되어 세상에 나오기 이전 아직 없는 그 사물을 상상해서 써야만 하는데, 유달리 그 상황이 조금 난감하게 느껴졌다. 물론 책에 담길 그림과 글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아왔기에 이미 그 내용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이야기는 책이라는 사물로, 물질적 삶으로 전승되며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될 때가 종종 있고 『모닝빵』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었기에 섣불리 책의 면모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게 어딘지 불안했다. 회화 작품을 찍은 사진을 보며 그 회화 작품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어쩔 수는 없다. 현재의 출판 산업의 유통 체계에서 편집자는 대개 최종의 사물을 예상하며 보도자료를 쓴다.1 책의 사물성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데이터)을 중심으로 책의 의미가 설명되는 보도자료의 텍스트 중심주의는 이런 구조적인 맥락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책은 데이터를 전달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주 가끔 발견될 뿐이다. 그런데 그런 책은 우리에게 반드시 ‘다른’ 읽기를 요청한다. 심지어 읽기를 힘들고 어려운 일로 만들기도 한다. 물론 모든 책은 언제나 ‘읽기의 어려움’을 품고 있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모든 것을 마음만 먹으면 잘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우리의 믿음 자체를 쿡쿡 찌른다.

『모닝빵』은 무사히 제작되어 세상에 나왔고, 나는 완성된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어떻게 다시 소개문을 쓸까 고민했지만 결국 미리 써둔 저 짧은 글을 변형 없이 계속 쓰기로 마음먹었다. 책이 나오고 보니 이 소개문은 책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인물, 사물 중 몇몇을 떼어내 나열한 일종의 발췌문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작은 파편들의 모음. 그러면 반대로 이 책의 전모는 무엇일까? 나는 며칠간 『모닝빵』을 보다 보니 이건 아주 시끄러운 책이며 이 시끄러움이 가장 중요한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만드는 과정에서는 전혀 의논된 바가 아니었지만, 오직 시끄러움을 만들어내 보고자 여러 사람들이 합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시끄러움이란,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상태, 인지되지만 식별되지 않는 것들로 가득한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시끄러움은 설명해낼 방법이 묘연했고, 온전하지 않기는 해도 발췌한 형상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모여 있는 이 긴 한 문장이 이 책의 시끄러움을 가늠하게 하기는 했으므로, 그냥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시끄럽다고 해버리는 대신 시끄러움에 대한 상상으로 안내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진실한 소개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보도자료를 쓰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되돌아보았는데, 보도자료라는 형식은 특정한 방식의 읽기를 강조하고 재생산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다양한 접근과 서술의 양태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도자료의 글쓰기가 내밀하게 공유하는 것은 책이라는 사물을 보다 선명한 신호로, 안정화된 주파수로 재생산하는 방항성이다. 그런 면에서 보도자료는 서평과 대척되는 장소성을 가진다. 보도자료라는 텍스트는 아직 책을 보지 않은 사람들,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구매자)를 책으로 이끌고 와 접속시켜야 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책의 논의를 간명하게 정리한다거나, 저작의 계보나 저자의 서사를 쓰는 보도자료의 유형은 모두 책의 시끄러움을 신호화하는 침투 전략들이다.
물론, 정보량이 높은 상태에서 신호를 추출하는 건 모든 독자가 수행하는 읽기의 한 종류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책의 독자는 읽기를 통해 하나의 책에서 한두 개의 신호를, 운이 좋다면 여러 개의 선명한 신호를 추출해낼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를 가로질러 떠돌아 다니며 그것이 품은 무수한 주파수가 몇 개의 채널로 통합되고 합의되는 사물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절차가 하나의 문화 형식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생산주의와 결부된 명시적 지식의 역사적 형성과도 연관된다. 이 문화에서 좋은 독자란 다른 독자와는 다른 신호를 발견하거나 추출해 자신만의 고유한 주파수 채널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반대로 아무런 신호도 추출하지 못하면 읽기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문화의 구성원이 훈련하고 참여하는 지성의 장이란 바로 이와 같은 필터링의 과정과 주파수를 정복하기 위한 경합 위에 성립한다.

『모닝빵』을 마주보고 그것의 보도자료를 쓰려 했을 때 내가 느꼈던 곤란함, 불편함과 같은 감정은, 이 책이 바로 그러한 문화 자체를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이해한다. 그러니 화음과 선율이 아니라 시끄러움이 들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시끄러움으로부터 신호를 추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끄러움을 감당하기를 요구한다. 그 요구에 응하자면 읽기는 시끄러움을 소진시키는 일이 된다. 그러한 읽기 뒤에 남는 것은 선명해진 세계가 아닌 불투명한 세계다. 아감벤은 독서의 불가능성에 대해 얘기하며 바로 이 “불투명함의 순간”, “책을 읽을 수 없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2 물론 이 책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신호화하고 선명히 만드는 것이 틀린 읽기는 아니다. 다만 그런 읽기의 시도는 이 책의 사물성에 비추어 보자면 강도 높은 갈등을 유발할 뿐이다. 『모닝빵』은 신호화에의 시도를 미끄러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시끄러움의 과잉과 잉여를 이 책의 의미로 상정하고 세상에 내어놓으려고 할 때, 보도자료 쓰기는 함정과 같은 것이 되고 나는 출판 산업의 관행과 갈등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내가 겪은 어려움은 단지 글쓰기의 어려움만은 아니었다.

가끔 『모닝빵』이 무슨 이야기인지, 어떤 책인지 잘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말해주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럴 수도 없거니와, 이 책의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설명해주기보다는 책을 만들면서 중요하게 고민했던 텍스트의 편집 방식 하나를 말해주었다. 이상우 소설가가 쓴 글은 어떻게 보든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느리고 또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부서지고 분산되는 현실에 관한 (텍스트 형태의) 이미지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를 책 전체에, 그림 사이사이에 쪼개어 넣는 편집 작업을 하면서, 나는 문득 이 텍스트를 ‘이야기화’하라는 제안을 독자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디자이너에게 이 텍스트를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보더라도 ‘읽는’ 것이 가능한 방식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글자를 모르는 이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책. 아니 오히려 글자를 몰랐을 때 읽히는 것이 있는 책. 그러려면 텍스트가 의미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적 방식으로도 존재해야만 했다. 그렇게 『모닝빵』의 텍스트는 그림들 사이에 흐릿하게 숨어들어 꼬물꼬물 움직이면서 그림들이 만든 시끄러운 세계에 참여하게 됐고 나는 이 책에서 텍스트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 세계에서 모호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인 어떤 것이기도 한 것. 사실 세상에는 이야기보다 그런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지 않은가. 편집에 대한 이런 사연을 귀띔해주면, 『모닝빵』 읽기의 어려움을 고백했던 이들은 다른 실마리를 얻은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들에게 책을 다르게 읽어 보라고, 그런 일이 가능한 책이라고 넌지시 제안한 것일 테다.

다르게 읽어보라, 참 애매하고 무책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선프레스가 제안하는 다른 읽기라는 것은 신호를 다르게 추출하라는 재생산적 읽기가 아니라 시끄러움을 소진시키는 비생산적 읽기다. 이 행위를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모든 면에 있어서 생산성의 개념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척 어색해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자면, 나는 3년 전부터 필드레코딩을 취미삼고 있는데, 이 행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비생산적 읽기다. 나도 처음에는 필드레코딩을 주의 깊게 소리를 듣고 어떤 유의미한 소리를 발견하는 행위로 이해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행위성이 내 귀에 들려오는 복잡하고 잡다한,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변하고 일렁이는 소리라는 움직임과 불화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정 소리를 포착하려는 행위는 어떤 소리의 특징을 명사화하여 고정시키려는 일과 다르지 않은데, 움직임 그 자체인 소리는 그러한 시도로부터 언제나 유유히 빠져나간다. 자연스레 청취는 구분 가능한 특징을 찾는 시도로부터 움직임 그 자체를 듣는 것으로 돌아 나가게 되었는데, 이것에 집중하다 보면 구분 가능했던 선명한 신호마저 어느 순간 무수한 소음 사이에 묻혀 형태를 잃게 되고 마주하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 과잉뿐이다. 이 과잉의 실재를 마주하면, 비로소 읽기의 대상은 신호에 국한하지 않으며 동시에 읽기는 신호를 추출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비신호를 읽는 능력이다.

데이먼 크루코프스키의 『다른 방식으로 듣기』는 아날로그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전환기를 역사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일어난 심대한 문화적 변화를 관찰한다. 핵심은 “소음으로 풍요로운 세상과 오로지 신호만을 얻으려 애쓰는 세상”3사이의 차이다. 아날로그 기술에서 신호는 언제나 소음과 결합해 있고 우리는 신호를 소음과 구분해 듣지 못한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소음으로부터 신호를 구분해내고 신호를 보다 선명히 조형하는 이념을 가진다. 아날로그 기술이 소리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면 디지털 기술은 소리를 선별하도록 한다.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다. 예컨대 무엇을 소음으로, 무엇을 신호로 규정할 것인지, 또 여러 신호들 중 어떤 신호를 가장 우선하는 본질로 여길 것인지 하는 가치판단의 과정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디지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현실효과를 발휘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현실효과는 실재의 수많은 이질성들, 이해 불가능한 노이즈를 제거함으로써 성취된다. 이로써 우리가 잃은 것은, 크루코프스키의 말을 빌자면 의미심장하게도 ‘음악’과 ‘사랑’이다.4 우리는 결코 선명한 신호만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신호들의 상호작용만 두고본다면 우리는 음악과 사랑의 신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종말을 전망하는 이들은 디지털의 이념을 세계의 원리로 전망하는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사라질 것이 뻔한 것은, 글자를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한참 지면을 뒤적거리는 것만으로도 흘러가는 바로 그 시간이다. 사물세계의 소란에 참여하는 시간. 책을 만든다는 건 그러므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련한다.

나는 출판publishing, 出版을 책을 만드는making 일이 아니라 책이라고 이르는 것을 공적인public 장소에 내보내 움직이도록 하는 행위의 집합이라고 여긴다. 책이 어딘가에 놓이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에 관여하는 것이 출판의 일이라고 했을 때, 내가 출판을 하며 가장 많이 상상하는 것은 내어놓은 책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독자가 선명한 신호를 추출하는 생산자가 되기보다는 통제할 수 없이 커지는 시끄러움을 허락하고 그것을 소진시키는 모습을 더 많이 상상한다. 이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읽기가 아니라 사물의 움직임을 좇는 읽기다. 그리고 그런 독자라는 형상의 손에는 어떤 책이 들려 있는가 하는 상상이 뒤따른다. 읽기는 전적으로 독자의 역량 문제만은 아니다. 그런 독자를 가능하게 하는 책-사물의 발명 또한 그와 거의 동등한 픽션으로 남아있다. 이 픽션을 고심하는 데 있어서, 나는 읽기의 개념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는 중이다. 내가 보기에 읽기는 언제나 과잉, 잉여와 숙명처럼 맞닥뜨린다. 우리는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는 모든 것을 읽는다. 안 읽을 도리가 없다. 읽기는 의식적인 명령 수행 없이도 일어나는 자동적인 사건이다. 읽기는 본질적으로 시끄러운 것이며 신호의 추출은 거기에 관여하는 역사적 기술이다. 그러면 남은 시끄러움은 더는 효용 없는 것이어서 제거되어야 할까? 디지털 기술은 그렇다고 말하며 곧장 폐기를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인간은 신호를 추출하는 지성적 기술을 훈련한 시간보다 시끄러움의 대지를 배회한 시간이 더 길 것이다. 우리가 잊어가는 것은 시끄러움을 소진하고 소모시키는 다양한 방법이다. 그 읽기는 시끄러움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것에의 참여다. 또, 유용함이나 유익함과는 관계 없는 문화적 행위이다. 이제 그것은 심지어 하나의 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앎 없는 밤의 읽기는 바로 그러한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읽기, 그런 읽기를 열어두는 책에 관한 이미지다. 조르주 바타유는 『저주받은 몫』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장에 이용될 수 없다면 에너지의 과잉은 그 즉시 소멸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피한 소멸이 어떤 명목으로든 유용한 것으로 통용될 수 없음은 또한 자명하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유쾌한 소멸인데, 이는 또다른 불쾌한 소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다. 더이상 유용성이 문제가 아니라 즐거움agrement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의 여파는 결정적이다.”5



  1. 현재의 일반적인 서적 유통 시스템에서는 아마 대부분의 편집자들이 인쇄 및 제작을 위해 책의 데이터를 넘기고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보도자료를 쓸 것이다. 보도자료 작성은 책을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한 처음 단계이고, 책보다 보도자료가 먼저 배포되어야 책이 유통될 수 있다. 출판 산업의 주된 서적 유통망인 온라인 대형 서점에 책을 입고하려면, 보도자료가 책보다 먼저 해당 서점에 보내져 책에 대한 정보가 서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야 서점을 통해 독자들은 책을 주문할 수 있고 서점은 출판사에 발주를 넣을 수 있다. 반면, 출판사 설립 초창기에 나는 가끔 실물 책자를 들고 오프라인 서점에 방문해 입고 문의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책을 먼저 보여주고 책에 대한 보도자료는 추후에 메일로 서점에 보내주곤 했다. 돌이켜보니 이 두 방식에는 책의 흐름에 관한 심대한 차이가 있다는걸 깨닫게 된다. 

  2. 조르조 아감벤,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 『불과 글』, 책세상, 2016, 131쪽. 이 글의 마지막에서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독서의 어려움에 관한 이 짧은 글을 마치면서 독자 여러분에게 안겨주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글로 쓰인 언어를 그것의 기원이 되며 동시에 여정의 목표가 되는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그 언어 속에 거주하면서 그 언어를 끊임없이 다루고 다스리는 무언가와 같지 않은가?” 

  3. 데이먼 크루코프스키, 『다른 방식으로 듣기』, 정은주 옮김, 마티, 2023, 133쪽. 

  4. “게리 톰프슨은 광대한 스케일로 사고하는 음악학자입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목소리의 비언어적 부분으로 소통하는 우리의 능력은 대단히 심오한 것이어서, 유아기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유전자 구성에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있기 전에, 그러니까 수십만 년 전에 발화가 있었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발화는 음악적인 성질을 띠었고, 그러한 음악성은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소통하게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도구 제작이나 사회 조직, 또 아마 사랑도요.” 앞의 책, 65~66쪽. 

  5.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47쪽. 이 글의 제목 “앎 없는 밤”은 이 책의 해설에서 옮긴이가 “비지의 밤la nuit du non-savoir은 그렇게 세계로 드리운다.”라고 쓴 문장에서 비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