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범

학교를 열며

2024년 10월 1일 ~ 2025년 3월 31일

간단한 사고실험 하나를 해보자. 하나의 닫힌 공간이 있다. A는 그 공간의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지만 안쪽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특정 시간 구간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B는 공간 안팎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고 유한하다. 이때 A와 B중 누가 더 앎에 특권적인가?

언뜻 이 질문은 앎에 있어 시간의 무한성과 공간의 무한성 중 무엇이 더 특권적인지를 묻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주어진 지문에서 양자택일을 하기보다는, 이 사고실험 자체가 너무 허술하게 설계되었다고 지적할지 모른다. 닫힌 공간은 몸을 겨우 가눌 뿐인 좁은 방만한가 아니면 태양계만 한가? 닫힌 공간은 화이트 큐브처럼 텅 비어 있는가 아니면 복잡한 현상과 사물들로 가득한가? A가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한두 시간 정도인가 아니면 무한에 가까이 긴가? B는 무한한 공간을 걸어서 이동하는가 아니면 매우 빠른 속도로도 이동할 수 있는가? 언뜻 생각해도 현실 경험에 비추어 수많은 변수를 떠올릴 수 있고 이 변수에 따라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허술함이 가진 이점이 있다면, 허술함 덕분에 여기저기서 비집고 나오는 앎의 수많은 조건을 검토해 볼 수 있다면,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반발심과 수많은 이미지를 붙잡아둬 보는 것은 그렇게 쓸데없는 일은 아닐 수 있다. 이 사고실험은 앎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앎을 갱신하려는 노력을 하려 할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 판단해 보기 위함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처음의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A를 선택하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B가 더 좋을까? 문제를 우회해 보기 위해 이야기에 관해 생각해보자. 아주 오래전에는 신비한 우연적 사건들로 가득한 길을 떠나는 모험과 방랑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서사였다면, 요즘 유행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 같은 시간 선을 반복해 살게 되는 회귀와 환생의 이야기이다. 이는 언뜻 서로 다른 서사 양식처럼 보이지만, 앎의 특권적 주체라는 판타지를 투사한다는 점에서는 엇비슷하다. 그리고 그 판타지가 투사되는 곳은 우리가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의 사고실험은 일종의 함정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A와 B는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A와 A’의 관계에 더 가깝다.

그럼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여기서 A, B와는 다르게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골똘히 생각 중인 C를 상상한다. C는 무한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무한한 실재에 스스로 참여한 후 갖가지 다채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소진시키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는가, 남은 것들은 어떻게 배열되고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숙고하며 앎 자체를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밀어낸다. 사고실험학교는 그런 C의 자리로서 고안되었다. 사고실험학교는 닫힌 공간이라는 하나의 이미지-현실에서 촉발되었고 다른 기술적 비전에 대한 상상으로 길러진 장소다. 리베카 솔닛은 ‘기술’을 두고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 기법, 혹은 장치”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기술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한 이 정의를 숙고하며 사물과 세계의 변형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저런 유형을 산출해보는 것이 그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픽션을 재생산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달아나며 진실의 방향을 가리킬 픽션을 구하는 것이다. 많은 시도들이 높은 확률로 실패할 테지만, 거기서부터 비로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술한 사고실험이 무수한 이미지들을 불러오듯이 말이다.

우리는 지금껏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일의 역량을 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외부의 기술 장치들에 이양해 왔다. 사물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과정, 픽션의 세계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일을 바로 그만큼 서서히 망각해 간다. 사고실험학교는 바로 이런 닫혀가는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앎의 점진적이고 전면적인 재구성에 대한 요청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코이너 씨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각한다는 건 곧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지. 내가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를 변화시키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희망이 아버지가 아닌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아포리즘에 빚져 말해보자면, 생각하기는 사물과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역량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희망을 전망하는 일과 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학교는 바로 그런 희망이 가능한 장소여야 한다. 생각하기와 희망의 관계가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그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기를 걸어볼 만하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시급한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