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재

미래 희곡 운동장 [마침]

2025년 1월 8일 ~ 2025년 3월 12일
신청

개요

희곡과 무대 사이의 틈, 공백에 대한 탐구. 이 공백으로부터 희곡이 지닌 고유하고 자율적인 픽션의 힘을 찾아본다.


수업 계획서

극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질문은 요컨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이 왜 희곡입니까? 이것을 왜 연극으로 해야 합니까? 나의 희곡은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여 무대화를 지향하지 않는 것으로, 온전히 무대화하기 불가능하거나 무대화 하였을 때 오히려 그 힘을 잃게 되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아마 조금 낯선 형식―축소된 대화체, 산문체의 사용, 무대를 지시하기보다는 희곡 내부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지시문, 등장인물의 이름이 대사 밖에 놓이지 않는 양식, 극의 전개를 중단시키는 장면들의 배치―들이 나의 희곡을 희곡처럼 보이지 않게 했으리라. 나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앞선 질문들은 기존의 희곡 및 연극 모델을 중심에 두고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의 자격을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글쓰기를 해명과 변호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희곡은 무엇이며 연극은 무엇인지, 진정 열린 질문을 나누고 싶었다.

최근의 희곡 담론은 작품의 내용과 극작술을 시대적으로 해석하고 소재의 동일성으로 개별 작품들을 범주화하는 데 관심을 둔다. 희곡 작품들은 페미니즘, 퀴어, 비인간 등의 키워드로 관통되고 또 결속된다. 나는 희곡에 가시화된 이야기를 담론의 요소로 곧장 받아들이면서 정작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는 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현상을 우려한다. 이때 희곡을 읽어내는 언어는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 소재주의적으로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재난과 혁명, 시대적 변혁을 거치며 극작가들은 이전과 다른 희곡쓰기를 꾸준히 실천해 왔다. 그러나 희곡의 틀을 다시 세우지 않은 채 거기에 담기는 이야기와 태도만을 교체해 왔다는, 혹은 제도가 그러한 희곡만을 인준한다는 의구심은 계속해서 돌아온다. 범주를 설정한 뒤 ‘공통적인 것’을 규명하는 작업 역시 개별 작품들의 형상적 차이가 긴장 속에서 관측되지 못하고 동일성 외부의 여남은 것들로서 연극사적 기술에 종속되어 버린다는 한계를 지닌다. 작품에 대한 정치적 동의가 미학적 가치로 환원되고, 희곡의 자율성을 사유하는 언어의 공백이 장르의 선험적 필연성 혹은 이야기의 윤리적 당위성으로 다소 낭만적으로 봉합될 때,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희곡의 자리에 대한 엄격하게 형이상학적인 사유다. 희곡의 틀을 다시 짜기 위한 사고실험이다. 이는 무대 위에 다양한 존재자를 재현하고 시대에 긴급하게 주어진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작업만큼이나, 아니 사실 그보다 더 정치적인 실천이리라. 희곡의 극단까지 가서 없던 자리를 내고 오늘날 희곡의 새로운 자율성을 탐색하는 일, 나아가 글쓰기로서 이러한 실험을 도입하는 희곡을 발명하는 일, 이것이 우리 수업의 첫 번째 과제다.

그러므로 ‘이것이 왜 희곡입니까?’라는 질문은 더 앞선 곳으로, 더 결정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곳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뀔 것이다. 희곡이란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 텍스트이며 그 상상은 텍스트 안과 밖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희곡의 픽션적 역량을 우리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나아가, 몸의 자리를 내고 목소리를 공명시키며 움직임의 조건을 형성하는 글쓰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텍스트를 희곡이라 이를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려 애쓸 때 희곡의 낯선 양식들은 ‘이것이 왜 희곡입니까?’와 같은 폐쇄적 질문, 편의상 ‘전통적’ 희곡 모델을 불러와 견주는 구도, ‘소설적’이라거나 ‘영상적’이라는 말과 같이 타 장르의 성격을 빌려오는 두루뭉술한 해석을 넘어 희곡 담론의 전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수업의 두 번째 과제는 희곡과 무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험하는 것이다. 희곡은 그리스 비극 이래 20세기 중후반까지 연극의 가장 지배적인 요소였다. 1970년대에 들어 베케트와 아르토를 거치며 몸의 현시, 무대의 실제를 통해 희곡의 권위를 탈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실천은 연극과 퍼포먼스, 텍스트의 다양한 형식을 이끌어냈다. 오늘날 희곡과 무대는 더 이상 권위를 경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의 타자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미학적 영향력을 경합하는 구도는 여전히 되풀이된다. 희곡이 무대에 대해, 무대가 희곡에 대해 미학적 우위를 점하거나 역량의 양보를 요구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 문제는 희곡과 무대의 관계가 사유의 대상이 되기도 전에 협업의 태도나 권리와 같은 현실 차원의 논의로 이르게 전환된다는 것이다.

희곡은 자주 성급한 질문을 받는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희곡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문학작품입니까, 무대화를 전제한 텍스트 재료입니까? 예술 제도 내에서 희곡은 ‘문학성’과 ‘연극성’이라는 막다른 갈림길을 반복해서 마주친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무대화에 쉬이 협력하지 않는 희곡은 ‘레제드라마’라는 공격적인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희곡을 독서만으로도 충분한 문학 작품의 한 갈래로 볼 때, 이러한 관점은 그 타당성과 관계 없이 무대에 대한 희곡의 역량과 입지를 위축시키면서 작동한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희곡이 연극의 다른 요소들보다 지배적인 자리를 점해야 한다는 권위에의 요청으로 이어진다. 대다수의 희곡이 출판, 유통되지 않는다는 현실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희곡을 연극의 재료로 볼 때 여기에는 일종의 사용권 투쟁의 맥락이 담긴다. 희곡을 무대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변형하기를 요청하는 근거로써 불려나오는 것이다. 희곡의 자율성, 무대와 희곡 사이에 놓인 간극의 존재를 외면하는 접근이기도 하다. 이처럼 희곡의 장르적 포함관계를 따지는 논의는 손쉽게 권한의 문제로 끌어내려지고 이 과정에서 소환되는 장르 체계의 테두리는 어느 때보다 완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곡이 둘 중 하나에 속한다거나 둘 모두에 속한다는 손쉬운 결론에 맴돌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희곡이 문학성과 연극성을 두루 갖추고 있거나 둘 중 하나만이 탁월하다는 식의 (특히 심사평!) 언술 또한 바라건대 폐기되어야 한다. 우리가 희곡의 위치성을 탐색하기 위해 들여다봐야 할 곳은 다름 아닌 희곡과 무대 사이의 틈이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긴장이다. 따라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희곡과 무대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내 생각에 다른 매체로의 실연을 전제하는 여타 텍스트들과 희곡이 차별되는 중요한 지점은 희곡이 그것 내부에 결코 실연되지 않는/않으려는 힘을 의도적으로 지닌다는 것이고 이 힘이 희곡을 희곡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희곡은 무대화를 전제로 쓰이면서 동시에 무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부분, 연극의 타자를 내포하는데 이 불가능성의 부분이 희곡을 과거적 사물이 아닌 미래적인 운동으로 변모시킨다. 희곡의 불가능성은 기존의 무대를 지시하는 작업으로부터 미끄러져서 연극을 초과하여 무대 주위를 배회하는데, 분명한 것은 연극이라는 양식을 초과하는 희곡만이 아직 오지 않은 무대를 호출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수업의 주된 활동은 희곡과 무대의 관계를 다시 짓고 재설정된 문제의식에 입각해 희곡과 무대 사이에서 글쓰기로서 무언가를 실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선배도 어떤 모범도 없다. 우리들 뒷통수에 늘 자리하고 있는 어두운 무대, 그리고 흰 공백의 연습장만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처지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희곡 역시 우리 수업의 꼭 맞는 모델로 제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업에서 희곡쓰기 교수학습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 수업의 목표는 희곡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희곡에 관한 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설정하고 여기에 답을 하려 애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한국 연극계의 언어적 태만, 현실 정치에의 의존, 닫힌 질문과 닫힌 형식을 양산하는 희곡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탐험대원이자 연구원으로서 등을 맞대고 둥글게 모여 서서 각자의 앞을 향해 출발할 것이다. 그러면 서로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될 텐데, 거기까지 가는 길을 미래-희곡 운동장이라 부르자.


일정

2025년 1월 8일, 15일, 22일, 2월 5일, 12일, 19일, 26일, 3월 12일 (수요일, 19:00-21:00) [8회]

장소

나선도서관

정원

6명

수업료

48만 원 (분납 가능)

신청 기한

2024년 12월 30일 자정까지

신청자 제출 자료

희곡과 무대에 관한 상념을 담은 에세이 (분량: 2,000자~4,000자)

  • 제출 자료를 살펴 참여자를 선정하며, 선정 결과는 개별적으로 알려드립니다.


진행

김연재

김연재의 텍스트는 대개 넘쳐남을 통해서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 넘쳐남의 방식이 중요한데, 그것은 그릇의 크기를 넘는 과함의 넘침이 아니라 그릇을 세차게 흔들어서 생겨나는 넘침이다. 그렇게 넘쳐나서 주변에 흩뿌려진 것은 얼룩으로 남고, 그것은 지울 수도 없고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곤란함을 불러 일으킨다. 독자는 곤란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물론 작가 또한. 넘친 것, 얼룩으로 남은 것은 이야기를 초과한 감각과 이미지일 수도 있고, 현실을 벗어난 변신한 물질들일 수도 있고, 또한 무대에 설 수 없는 문학적 잔여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는 맥락에 따라 여러 대답이 가능할 테지만, 이 목록 자체가 지시하는 것은 ‘이탈’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세찬 흔들림의 운동성을 기억하게 된다. 이러한 운동성을 일으키는 작업이 바로 김연재의 글쓰기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이 흔들림의 운동성은 ‘희곡’이라는 미지의 축을 중심으로 생성된다. 글쓰기가 생성한 운동, 그로 인한 세찬 흔들림과 흔들림이 뱉아낸 잔여물이 남은 테이블은,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문학적 허구에 대한 모험이 이루어지는 운동장이 된다. <없는 시간> (2024), <매립지> (2023), <복도 굴뚝 유골함> (2022), <낙과줍기> (2022) 등을 쓰고 공연했다. 지은 책으로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이음, 2021),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가제)』(나선프레스, 근간)이 있다.


수업에 관한 Q&A

희곡이나 연극과는 관련 없는 일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수업을 들을 수 있나요? 희곡의 픽션적 역량에 대해 고민한다는건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요?

네, 희곡이나 연극과 관련 없는 일을 하셔도 수업을 들으셔도 됩니다. 수업계획서 마지막 문장에 썼듯, 이 수업의 중요한 방법론 중 하나는 각자의 앞을 향해 출발하여 서로 다른 곳에 도착하는 것이니까요. 이곳에서 희곡과 연극에 대한 배움을 얻으셔도 좋고, 희곡을 통해 자신의 작업에 적용할 문제를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희곡의 중요한 특징을 운동성, 외부를 향한 열림, 잠재된 시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거칠게 이야기해보자면, 다른 문학 장르들은 작가의 내적 사유가 글로써 외부로 표현되고 그것을 담는 매체는 대부분 출판, 인쇄이지요. 이와 달리 희곡은 외부의 재료-무대, 소리, 물질, 이미지, 몸-과 적극적으로 관계함에 따라 작가의 사유와 스타일이 변화합니다. 글을 발표하는 매체 역시 고정되지 않지요. 미래와 관계하는 방식을 찾는 글쓰기라는 점에서 희곡은 관습으로부터 가장 멀어져야 하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희곡은 기존의 언어, 장르적 관습과 불화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헤맴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잠재하는 텍스트를 쓰고 그것을 다른 재료들과 충돌시키고 변화가 일어나는 ‘사이’를 관찰하는 작업은 무언가를 붙잡아 고정하려는 힘으로부터 벗어나 상상하는 법을 훈련하는 일입니다.

희곡의 틀을 다시 짜는 사고실험’은 희곡 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나요? 이 수업에서 우리 는 무엇을 하게 되나요?

저도 여러분의 에세이를 받아 보아야 세부 커리큘럼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생들마다 희곡에 대한 경험이 다를 것 같아서요.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우리는 무엇을 희곡이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두고 정교한 가정들을 세워봅니다. 함께 글을 읽으며 연구, 공부하고요. 그리고 괴짜 과학자처럼 그 가정을 글로써 실험해봅니다. 일종의 캐주얼한 희곡론 쓰기와 그것의 실천, 희곡 쓰기와 그것에 대한 자기 비평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희곡을 내용적으로 발전시키거나 합평을 하거나 극작 기술을 배우기보다는 어떤 그릇에 희곡을 담을지 고민하면서 독창적이고 이상한 글쓰기를 발명해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수업 후반부엔 희곡을 실현하는 작업도 하게 될텐데요, 이때는 장소가 연습실이나 (임시)극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희곡이 왜 무대로 가지 않고 운동장으로 나아가나요? 운동장은 어떤 곳일까요?

운동장을 떠올리면 잔디나 모래가 깔린 원형 공터가 떠오릅니다. 운동장에서는 운동도 하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수돗가에서 손을 씻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학교에 들어오고 나갈 때 우리는 운동장을 거쳐야만 합니다. 배움을 위한 아주 넓은 문지방인 셈이지요. 운동장에는 학교와 학교 아닌 곳을 나누는 펜스가 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운동장은 그 안에서 행위하는 주체들에 의해 펜스를 초과하여 넓어집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배움의 궤적으로 계속해서 생성되는 장소인 것입니다. 운동장은 어떤 행동들이 누적되고 예비된, 역동적인 공터로 거기 있습니다. 제 생각에 무대는 어쨌거나 결과물로서 관객들에게 수용됩니다. 그러나 운동장은 운동화를 신지 않아도 걸을 수 있는 장소이지요. 몇 학년 몇 반이라는 명패도, 특정한 누군가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의 수업이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희곡이 운동장을 향해 갈 때 무대로 가는 다양한 길 역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