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및 상영작 목록

상영 시간표

기획의 글
풍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풍경이 흔들려 사라지는 그만큼 몇몇은 흩어졌고 몇몇은 풍경을 떼어내 침묵시켰으며 몇몇은 스스로 풍경이 되고자 그 속으로 들어갔다. 풍경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남은 이들은 드물다. 오민욱은 그 드문 사람 중 하나다. 보다 세심히 말해보자면, 그는 가시적인 풍경을 통해 우리와 풍경 사이에 놓인 무언가를 지켜봤고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어떤 이들은 그 무언가를 지켜봤고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어떤 이들은 그 무언가를 ‘역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역사 또한 풍경에 언뜻언뜻 비치는 가시성일 뿐 오민욱이 바라보는 시간의 덩어리, 즉 켜켜이 쌓여 끊임없는 진동을 불러일으키는 흐릿한 것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불충분하다. 풍경이 흔들려 사라지는 그만큼 우리와 풍경 사이에 놓인 무언가 또한 끊임없이 흐른다. 영화가 그 흐름을 추측한다 하더라도 영화로서는 그 흐름을 멈추지는 못하기 때문에 오민욱은 어떤 장소를 방문하고 다시 방문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풍경을 지켜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 땅의 여진을 따라 걸어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언젠가부터 자신의 영화에 텅 빈 어떤 공간 혹은 어둠의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어떤 형상을 세운다. 그 공간과 형상을 포함하는 시간은 오민욱이 지켜보던 진동 그 자체와도 닮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무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기에 일단 유령이라고 불러 보기로 한다.
<오민욱: 풍경과 유령>은 지난 10여년 동안의 오민욱의 영화와 그 실천의 궤적을 살펴보고 그것과 함께 걸어보기 위해 마련된 나선도서관의 상영 프로그램이다. 오민욱이 그간 제작한 14편의 작품을 6개의 섹션으로 편성하였으며, 각 섹션은 2023년 11월 한 달 동안 2-3회 상영된다.
프로그램 소개
풍경 1
“오큘로: 다루는 소재는 조금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이 흐릿한 시간을 더듬는다면, ‹재›(2013)는 거기서 조금 더 확장해서 도시 문명을 순환하는 유기체, 일종의 생명체로 보는 것 같아요.
오민욱: 비유하자면 ‹상›은 요리스 이벤스 다큐멘터리처럼 리듬감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작업 당시 촬영 장소인 부산근대역사관의 학예사를 만났어요. 저는 그 학예사가 이 공간의 과거에 대해 고려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나쁘게 말하면 업자 같았다고 할까요. ‘촬영은 대충하라’라면서 여러 제약을 두었죠. 하지만 평일엔 아무도 없어서 한 장면을 다섯 시간 동안 찍기도 했어요. 그렇게 한참 찍고 편집을 하는데, 너무 허세 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 공간을 이미지로 나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업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어요. 그때까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하 부미방)을 모르고 있었어요.
오큘로: 그럼 처음에는 그 사건에 때문에 시작한 건 아니었네요?
오민욱: 네. 처음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미 군정기로 이어지는 타임라인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유튜브 검색을 통해 우연히 부미방 푸티지를 발견했어요. 부산근대역사관이 박물관임에도 불구하고, 부미방 관련 전시를 꺼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밀어붙여서라도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어요. 푸티지를 논리적으로 배치하려 했는데 잘 안 돼서 최소한의 정리를 위해 내레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과정도 쉽지 않아서 논리적 전달은 포기하기로 했어요. [영상에 사용한] 사건 당시를 기록한 푸티지를 보면 거리에 사람들이 많거든요. 이 사람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건물 내부만 찍었었는데 거리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실제 거리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도 많았고, 뭔가 웅성거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백종관: 그렇게 웅성거리는 사운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쓰셨죠.
오민욱: 식별 가능한 음성 언어를 사용하면 이 음성이 이미지의 의미를 제한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한국어임에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들을 찾아봤어요. 녹음한 사운드를 푸티지 위에 올리고 유튜브에서 가져온 화면을 편집 툴에 불러올 때 이미지가 뒤틀리면서 노이즈가 생겼어요. 그걸 그대로 썼어요. 일그러진 느낌들로. [건물이]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옛날 동양척식주식회사나 미 문화원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화단도 새로 만들고. 도면을 보면 은행 건물이었기 때문에 천장이 굉장히 높았는데, 한 층짜리 건물을 세 층으로 나눠놨어요. 그래서 층마다 보이는 기둥들이 이 건물 설계 당시에 있었던 구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게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시작과 끝 그리고 가운데에 기둥을 배치했던 이유예요.”
- 「질감들: 오민욱x백종관 대담」, 『오큘로 002: 이미지, 먼지와 기녀비 사이에서』 중에서

상
Phase
2012 | HD | 20분 26초 | 스테레오 | 컬러 | 실험영화 | 한국
<상>은 부산근대역사관에 쌓인 질곡의 시간에 대한 발굴이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창의 프레임으로 분할되어 비춰진 형상들은 최면처럼 공간을 맴돈다. 분할된 형상과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텍스트를 통해 과거의 풍화된 시간들을 성찰한다. 우리의 시각은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만 머문다. 풍경과 우리 눈 사이에 존재하는 창은 비가시적 존재이다. 그 비가시적 존재는 공간의 풍화와 더불어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다. 이 존재를 암시하는 82년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의 (매체로부터 채집된) 형상과 분할된 현재의 형상은 일정한 파형을 이루어 낸다.

재
Ash : Re
2013 | HD | 65분 | 스테레오 | 컬러, 흑백 | 다큐멘터리 | 한국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풍경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가 서있는 공간과 흘러가는 시간을 서서히 사유하며 드러낸다.

적막의 경관
A Landscape between Past and Future
2015 | HD | 21분 | 스테레오 | 흑백, 컬러 | 다큐멘터리 | 한국
이 영화는 지난 몇 년간 부모님의 고향인 경상남도 거창에 벌초(伐草)를 위해 드나들며 경험했던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 속 이미지들의 채집과 배치는 자연 공간 위에 세워진 특정한 인공 장소와 벌초라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 나의 주관적인 경관 해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끝나지 않은 사건과 재난을 조심스레 꺼내보려고 한다.
풍경 2
<범전>은 부산 범전동 일대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다루는 시간은 하야리아 캠프가 부산시민공원으로 바뀌는 과정 동안이고, 그것을 통해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더 두꺼운 시간 까지를 보려 한다. 그런데 오민욱의 영화는 여기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라스트 나이트>는 <범전>을 이루고 있는 것보다 작은 조각들의 모음이자 더 이름 없는 것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철길, 건축물, 부지, 화분>은 그 장소를 다시 방문하고 또 방문함로써 만든 더 작은 부스러기들의 영화다. 영화가 끝난다고 해서 장소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풍경을 읽는다고 해서 장소가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불가능성 속에서 오민욱은 ‘반복하여 방문하기’를 영화적 실천의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영화가 만들어진 후 영화의 장소를 다시 방문함으로써 비로소 영화적인 것이 된다. 이는 영화를 역사를 쓰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에 가능한 많은 구멍을 뚫어 놓기 위함은 아닐까? 그리고 오민욱은 그 구멍이 텅 빔도 완전한 어둠도 아닌 누군가/무언가의 자리라고 이해하는 듯하다.

범전
A Roar of the Prairie
2015 | HD | 86분 17초 | 스테레오 | 컬러 | 다큐멘터리 | 한국
모든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초원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켜보던 풍경은 다음과 같다.
일장기가 불탄다. 전쟁이 끝났다. 감만 8부두를 통해 부산에 상륙한 미군은 넓은 초원을 발견한다.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초원. 미군은 그 초원위에 기지를 세운다.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성조기가 펄럭인다. 성조기가 불탄다. 미군이 떠나기 시작한다. 미군이 머물던 초원을 돌려받았다. 초원은 이제 공원이 되었다.
이 모든 풍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라스트 나이트
Last Night
2015 | HD | 14분 | 스테레오 | 컬러 | 한국
<라스트 나이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부산 범전동에 주둔했던 캠프 하야리아가 부산시민공원으로 탈바꿈 하는 과정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범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부산시민공원 조성이 시작되면서 캠프 하야리아 인근의 기지촌은 이주와 철거를 빠른 속도로 겪게 된다. 이 기지촌의 마지막 밤과 그 밤을 앞둔 주민들의 마지막 기념사진. 도시의 무수한 밤들 가운데 인간과 기능을 다한 시멘트, 그리고 무명의 고양이와 잡초 들이 보냈던 지나간 밤들이 흐트러진다.

철길, 건축물, 부지, 화분
new construction
2017 | HD | 1분 50초 | 무성 | 컬러 | 한국
<철길, 건축물, 부지, 화분>은 캠프 하야리아 인근 기지촌을 탐사하며 생산된 두 개의 기록물, <범전>과 <라스트 나이트>로부터 약 18개월의 시간이 지난 시점(2017년 1월)에 동일 장소를 재방문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작품이다. 기지촌에 살던 사람들은 기능을 다한 시멘트와 함께 사라졌다. 그 자리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은 시멘트가 강철뼈대를 채우는 피와 살이 되어 자라고 있다. 기지촌 터 너머로 변함없이 달리는 기차와 철길 주변의 예정된 폐허 속 화분에는 여전히 초록빛 식물들이 태양빛을 쫓아 자라고 있다. 조망 불가능한 자본의 광범위함이 만들어낼 새로운 폐허의 미래도 그 곁에서 멈추지 않고 속도를 경신한다.
풍경 3
오직 흐름만이 있는 텅 빈 곳을 공간이라고 한다면, 장소는 사라진 것들이 축적된 무게로 일그러져 무늬 진 공간이다. 그리고 역시나 일렁임을 멈추지 않는 곳이다. 영화는 스스로 움직이지만 또한 모순되게도 멈춤 없는 움직임과 사라짐에 취약하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하는데, 풍경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겹쳐보는 일이다. 그 이미지가 장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다.

어떤 숨겨진 풍경
Some Hidden Landscape
2016 | SD | 10분 40초 | 무성 | 컬러 | 한국
부산 진구 범전동에서 그들이 받은 <퇴거(명도)에 관한 안내문>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이 기원(祈願)의 기원(起源)을 찾기 위함이 이 작업의 최종목적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싶다. 우리는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들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기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 기원을 중심으로 적당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그러니깐 이 사건은 ‘왜’ 생겨났으며, 이 사물은 ‘왜’ 거기 있었으며 지금은 ‘왜’ 사라지고 없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살았던 범전동으로 돌아간다. 실제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의 형체는 여기에 없으며, 그 표면들만 겨우 디지털 이미지와 사운드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범전>의 촬영을 진행하며 일종의 보람을 느꼈다. 이 보람은 사라지는 것을 영화를 통해 기억하겠다는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때로부터 지금.
부수어진 집의 파편들과 그때 그곳의 어귀에서 보았던 사물들을 떠올린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결과물들은 실패다. 대부분 사후의 결과물은 실패한다. 생각은 모든 사태의 종결 이후에야 무게감을 수반한 채 도착한다. 사라지게 될 공간에 나는 도착했었고, 소멸과 망각을 전제로 기록을 시작했다.
범전동에서 그녀 또는 그에게 <퇴거(명도)에 관한 안내문>이 발송되었다. 이 안내문의 발신자는 건설회사이기도 하고 재개발조합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고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체제와 일련의 상황들을 목격하고 흘려보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내문의 발신자이기도 하다. 살던 집을 넘겨주거나 비워준다는 뜻의 명도. 명도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밝을 명(明), 건넬 도(渡)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숨겨진 풍경>에는 쇠락과 소멸 이전의 캠프 하야리아와 범전동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도림로 29길
Thick Forest
2019 | HD | 10분 53초 | 스테레오 | 컬러 | 한국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한 촬영은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풍경과 사물 위에, 촬영 행위 이전에 아카이빙한 정보들과 이 정보들을 토대로 설계한 다채로운 형식의 내러티브를 기입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우리가 이미지라고 부르는 형태의 결과물이 이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생산된다. 이 생산물들이 실존하는 세계와 어떤 참조점을 가지게 될지는 촬영자의 선택과는 무관하다.
<도림로 29길>을 촬영하기 위해 대림동을 2회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을 위해 정보들을 사전에 아카이빙하지 않았던 까닭은 명확한 목적을 가진 작업의 무대로 대림동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 방문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소환된 과거의 풍경들(중국의 하얼빈과 샤먼, 타이완의 진먼)은 대림동에 도착하기까지 경유했던 경험(과거에 경험했던 풍경들을 촬영하기 위한 행위들)의 총체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첫 번째 방문 때 보았던 대림동의 풍경들을 카메라로 기록하기 위해 그 장소를 다시 찾았고, 카메라의 프레임으로 눈에 맺힌 세계의 풍경들을 잘라냈다. 프레임을 가득 채운 ‘도림로 29길’의 풍경에 기입된 것은 첫 번째 방문 당시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온 과거의 경험들이었다.
끊임없이 프레임 바깥의 무언가를 당기는 것, 정체된 채 바깥으로 산란하며 원근을 교란하는 이미지들. 어쩌면 ‘도림로 29길’의 풍경을 촬영한 <도림로 29길>은 대림동이라는 물리적인 동시에 이념적인 공간이 무엇으로부터 기원하는지에 대해 사유해보는 방아쇠가 될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돌아와 수고했어
Messages From Home
2016 | HD | 6분 20초 | 스테레오 | 컬러 | 한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들이 자꾸만 떠올라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설명하기 어정쩡한 이유들로인해 집에서 일어나는 일상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쌓아둔 필름에 찍혀진 집 밖의 이미지들, 그리고 집안의 가족들로부터 받은 메시지들을 훓어봤다. 이 이미지와 메시지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이어보기 위해 집안의 소리를 채집하고 창문너머 보이는 집 밖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과정을 통해 발견 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카메라와 바깥 풍경 사이에 평온하게 서있는 낡은 창문,
불투명한 유리창,
시간이 지나 건조하게 되풀이 되는 가족들로부터의 메세지,
비슷한 풍경들이 찍혀진 필름.
돌출되지 않은 채 평평함으로 쌓여진 이 존재들 틈에서 하나의 메시지와 하나의 이미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조심해서 돌아와 수고했어’,
그리고 사진 속 맑은 하늘.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보내는 텅 빈 메시지.
‘조심해서 돌아와 수고했어’.

옥화리에서
It’s good to speak to you again
2019 | SD | 14분 8초 | 스테레오 | 컬러 | 한국
조지송 목사(1933-2019)는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1963년 한국교회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 받은 후 영등포 산업선교회 초대 총무로 부임해 20년이 넘는 세월을 산업선교에 헌신했다. 그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언어를 실천함과 동시에 노동자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즐겁게 노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타락하고 추악한 노동 현장의 모습에 정직하게 분노했다.
산업선교에 바친 오랜 세월은 그의 육신을 시들게 만들었고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조지송 목사는 은퇴와 함께 쇠락해진 육신을 치료하기 위해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 강변에 작은 집을 짓고 요양을 시작한다. 조지송 목사의 은퇴를 아쉬워한 동료들은 강변의 작은 집을 ‘하나의 집’이라 부르며 조지송 목사의 실천적 역량을 공유함과 동시에 재충전을 위한 구심점으로 삼는다.
<옥화리에서>는 ‘하나의 집’이 위치한 옥화리 강변의 풍경과 그곳에서 시골 촌로의 삶을 살았던 산업선교의 선구자 조지송의 흔적들을 뜨겁고 푸른 계절 속에서 떠올려보는 작품이다. ‘산업선교의 선구자’ 조지송이 아닌, ‘인간’ 조지송은 강변의 촌집에서 채소와 곡식을 가꾸고 좋아하던 클래식을 들으며 옥화리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거나 그렸다.
조지송이 보았던(보고 싶었던) 풍경과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보고 싶은 얼굴’ 조지송을 지나간 여름날을 그리는 수필 형식으로 기록했다. 짙은 여름에 잠긴 강변의 작은 풍경들과 조지송의 오래된 얼굴은 자본의 세계에서 인간다움이라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섭리가 되어 말을 건넨다.
유령 1
“동아시아 지역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내전 상황에 빠져든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발발한 두 내전은 종전 선언 없이 중국과 타이완, 북한과 남한이라는 체제를 낳았다. 조각난 채 접경을 이루고 있는 이 국가들에는 전투만이 정지된 기이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기이한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 전후의 불안은 집단의식 속 다양한 군상과 함께 기이한 평화의 징후적 형상이 되어 타이완 해협과 대한 해협 사이를 흘러간다. 다큐멘터리 <해협>은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며 어머니에게 보내는 딸의 편지 형식을 빌려 이 기이한 현재를 표류하는 ‘얼굴과 풍경’의 기원을 그려낸다.”(작가 노트 중에서)

해협
Letters to Buriram
2019 | 2K | 2시간 6분 | 5.1채널 | 컬러 | 한국 & 대만
동아시아 지역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내전 상황에 빠져든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발발한 두 내전은 종전 선언 없이 중국과 타이완, 북한과 남한이라는 체제를 낳았다. 조각난 채 접경을 이루고 있는 이 국가들에는 전투만이 정지된 기이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기이한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 전후의 불안은 집단의식 속 다양한 군상과 함께 기이한 평화의 징후적 형상이 되어 타이완 해협과 대한 해협 사이를 흘러간다. 다큐멘터리 <해협>은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며 어머니에게 보내는 딸의 편지 형식을 빌려 이 기이한 현재를 표류하는 ‘얼굴과 풍경’의 기원을 그려낸다.
유령 2
<유령의 해>는 조갑상의 소설 『밤의 눈』에 관한 영화이며 <야경>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관한 영화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에 실제 세계의 사건을 덧입혔다는 것이고, 두 영화의 공통점은 경계에 서게 된 유령들의 자리를 살펴 마련하기를 고심한다는 것이다.

야경
Night Scene
2018 | HD | 18분 15초 | 스테레오 | 컬러 | 한국
1964년 발표 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실존의 세계를 모티브 삼아 써내려간,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 허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허구의 공간 ‘무진’의 성질을 부산의 해안가 지형으로 가져오면서 시작된 작업이 <야경>이다. ‘이기대라고 불리우는 장소’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기생설화를 불러온다. 어둠이 내린 도시에 불꽃이 섬광과 함께 터지는 순간 이기대가 아닌 ‘이기대라고 불리우는 장소’를 경유해 설화 속 유령들이 실존의 세계로 귀환한다. 이 귀환을 통해 원시성을 간직한 해안지형을 명명하는 기생설화가 과거를 간직한 역사의 유령들이 살아가는 비가시적 서사-공간인 동시에, 실존의 세계를 기술(記述)하는 체제의 망령들이 꾸며낸 소문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유령의 해
Eternal Brightness
2022 | 2K | 2시간 5분 | 5.1채널 | 컬러 | 한국
<유령의 해>는 2012년 발표 된 조갑상의 장편소설 『밤의 눈』에 관한 작품이다. 학살과 혁명을 지나 항쟁의 인파를 바라보며 닫히는 소설 『 밤의 눈』에서 흘러나온 풍경과 인물의 궤적은 삽화가 없는 소설의 이야기처럼 빛과 어둠 그 사이를 불투명하게 공명한다. 육체와 목소리를 잃은 소설 속 유령들은 잊힌 이야기를 소거하고 역사에 매장되는 것을 거부한 채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멈추지 않을 것 만 같은 후렴구처럼, 유령이 된 그들의 캄캄한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만월의 어둠으로 밤이 차오르면, 소설 속 텅 빈 자리에 오늘의 이야기가 담긴 빛의 삽화를 그려 달라고.” 잊힌 죽음과 도래하는 사태들 사이에서 유령들의 해가 밤의 눈을 뜬다.
유령 3
한 인물이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검은 화면. 그가 바깥을 본다. 검은 화면. 그가 문을 열고 들어 온다. 검은 화면. 한 인물이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

허구를 위한 조형적 인물
Fragments for Fiction
2022 | HD | 10분 46초 | 스테레오 | 컬러 | 한국
<허구를 위한 조형적 인물>은 <유령의 해>가 촬영되었던 장소 [부산 범일동 65번길 33]에서 전개되는 작품이다. 조형적이고 허구적인 이 시공간은 해체된 영화의 잔해를 보는 듯 느슨함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어떤 존재다. 이 잔해와 같은 작업을 준비하며 나는 영화를 작업할 때와 조금 다른 입장을 갖게 되었다. 영화는 주어지거나 창조해낸 파편을 고유한 형태 그대로 두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파편들을 어떻게든 조각난 상태로 두고 싶어도 영화라는 형식 내에선 파편들 사이의 작용들이 생겨나고, 그걸 보는 이들은 균열 없는 매끈한 파편의 결합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장소, 허구, 존재라는 파편이 고유하게 유지되는 시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 작품은 극장 바깥에 놓인 잔해 같지만, 이 잔해를 오후 5시에 시작해 저녁 8시에 끝나는 영화라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동절기의 긴 밤은 늦은 오후부터 이른 저녁 시간 사이에 어둠을 부여한다. 이 작업에 전시라는 명시적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어둠이 부여된 시간에 놓인 영화의 잔해가 또 다른 가정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